그중에서도 4000여곡(미발표곡 포함)의 작곡을 통해 암울했던 우리민족의 한을 달래며 위로와 안식을 주었던 주옥같은 많은 노래들이 백영호 선생의 음률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통은 곧 백영호 선생의 아픔이고 고통이 승화되어 노래로 나오면 위로가 되고 듣는 이들의 자신의 노래로 바뀌었다.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우리의 곁을 떠난 백영호 선생의 곡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그이 자취를 풍기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코로나의 악몽을 잠재울 정도의 광풍으로 우리의 안방을 찾아들었던 트로트의 열풍으로 백영호 선생의 수많은 곡들이 다시 우리의 국민노래들로 다가왔다.
그의 곡에 희로애락을 같이해 온 50여년의 세월을 담은 공간들과 함께 부친의 곡들을 되새겨보며 지난 세월의 부친의 염원을 이어오지 못한 자식의 안타까움을 기리기 위해 ‘백영호 기념관’을 마련했다.
더불어 팬들의 애환과 그리움을 담고 싶은 마음으로 틈틈이 백영호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간직해오며 그의 시대정신과 서민사랑의 마음을 전하고자 애쓰는 장남 백경권 원장(65)을 만나 보았다.
이미 백영호 선생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미자 선생의 ‘동백아가씨’ 작곡가로 유명하다. 유명한 작곡가이기 이전에 평생을 서민의 마음으로 서민의 정신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더 큰 음악계의 원로로 추앙받는다.
1920년 8월8일(음력) 부산에서 태어난 故 백영호 선생은 만주 신경음악학원을 나와 1948년 부산의 코로나 레코드사에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으며, 1953년 미도파 레코드사 들어갔다.
1948년 ‘고향아닌 고향’으로 작곡가로 데뷔한 그는 1953년 가수 방운아의 ‘마음의 자유천지’라는 곡이 첫 히트를 치며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피난 시절 고향을 그리는 곡조들을 담아내며 서민들의 마음을 달랬다.
당시의 백영호 작곡가의 고향 부산은 6.25 동란으로 피난민들이 들끓었으며 대중가요의 메카로 자리 잡았으며 서민들의 휑한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도구는 음악이었다.
1955년 진주에서 요양중이던 가수 남인수씨를 찾아가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직접 연주하며 나온 곡이 유명한 ‘추억의 소야곡’이며 당시 폐결핵과 사투를 벌이던 남인수 선생에게 재기의 희망을 주었던 곡이기도 했다. ‘추억의 소야곡’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백영호 선생은 1958년 ‘해운대엘레지’(손인호 노래) 등으로 인기를 구가하며 부산에서 작곡 활동을 하다가 전쟁의 아픔을 딛고 1964년 서울로 터전을 옮겨 1964년 지구레코드사로 새 출발을 한다.
작곡가로 한껏 무르익고 있던 시절 유명한 ‘동백아가씨’가 선을 보인다.
서울로 터전을 옮긴 백영호 선생은 1964년 이미자 선생이 부른 ‘동백아가씨’를 작곡해 일약 대한민국 최고봉의 작곡가가 된다.
당시 신인 가수로 ‘열아홉 순정’을 부르던 이미자 선생도 ‘동백아가씨’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며 35주간 연속 1위를 달리는 기록과 함께 100만장의 음반판매를 올리는 최초 기록으로 알려질 정도로 음악계의 역사를 써온 장본인이 바로 백영호 선생이다.
‘동백아가씨’는 노래로도 엄청난 히트를 불러 왔지만 영화로도 만들어져 재상영되는 인기를 누리는 등 음악계의 역사를 써온 당사자로 백영호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백경권 원장은 “그 당시 100만장이라는 음반 판매는 엄청난 기록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레코드회사의 산업화를 불러 온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백경권 원장은 “아마 그때 100만장의 음반기록으로 우리나라 레코드사의 획기적인 산업화가 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조용필씨의 ‘창밖의 여자’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 열풍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백영호 선생의 작곡가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가수를 보는 안목 역시 탁월했다는 평이다.
이미자 선생의 ‘동백아가씨’곡을 내 놓을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기성가수에게 곡을 주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백영호 선생은 당시 신인이지만 이 곡은 이미자씨에게 맞는 곡이라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 주효했으며 이후 가수 문주란을 있게 한 ‘동숙의 노래’를 비롯해 ‘서울이여 안녕’, ‘여자의 일생’과 드라마 주제곡으로 큰 히트를 했던 ‘여로’, ‘아씨’ 등 수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55년간 작곡가 인생 중에서 4000여곡을 작곡했다.
또 남상규의 ‘추풍령’과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 등 주옥 같은 명곡을 남겼으며 배호의 노래 ‘비 내리는 명동’은 작곡뿐 아니라 작사까지 한 곡이다.
백경권 원장에 따르면 ‘비 내리는 명동’ 등 유명한 곡들을 비롯해 300여 곡을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백경권 원장은 최근 들어 부친의 미발표곡들을 찾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있다며 3000여곡이 발표됐으며 미발표곡도 1000여곡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백영호 선생의 음악은 바로 서민들을 위한 마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기에 대중적인 음악을 선도할 수 있었고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인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백영호 선생은 ‘서민을 위한 서민의 작곡가’로 존중 받았으며 고향 부산을 잊지 않는 의리의 고향맨이었다.
지인들의 증언에는 마음은 항상 고향인 부산을 떠난 적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 작곡가로 너무 잘 알려진 백영호 선생의 애초 꿈은 가수였다는 것이다.
그의 꿈이 가수였기에 더 큰 애착으로 곡을 쓰고 음을 넣고 가수의 마음에서 또 듣는 서민의 마음에 더 다가갈 수 있는 노래가 탄생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영원한 서민의 대변자를 꿈꾸던 백영호 선생은 처가인 사천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그의 노래곡만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별의 삼천포’, ‘사랑은 삼천포에서’, ‘내 고향 삼천포’ 등 구 도심인 삼천포 벌리동이 고향인 처가 삼천포를 배경으로 한 노래도 상당 수 작곡한 것으로도 사랑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진주에서 30년간 병원을 운영 중인 장남 백경권 원장(서울내과)은 지난 1997년부터 부친의 음악인생을 담은 ‘백영호 기념과’을 병원내 마련해 아버지의 애장품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진열품들을 정리하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있다.
백 원장은 또 2009년에는 ‘백영호 작곡집’을 출간한데 이어 2016년에는 아버지 백영호 명예의 전당 ‘헌정 음악회’를 열기도 하는 등 부친에 대해 사무치는 정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8년 6월23일 사천종합운동장 특설무대에서는 ‘제1회 작곡가 백영호 음악제’를 개최하는 등 음악계의 보물인 부친의 업적을 간직하며 후배들의 지원에도 나서는 등 음악사랑이 대단하다.
백경권 원장은 특히 지난해 2월 ‘동백아가씨’라는 밴드를 통해 백영호 선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모임을 만들어 지난 2월25일 동백아가씨 밴드 개설 1주년을 맞았으며 밴드모임을 통해 지역출신 가수들의 다양한 방식의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피는 속일 수 없는 지 자신의 뜻을 좇아 의사의 길을 걸어왔지만 부친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싶어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고 있으며 피아노 연주는 웬만한 프로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는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며 고교와 대학시절 아버지의 작곡조수와 가수지망생들의 연습을 도맡았다고 알려진다.
그의 사부곡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에 부친의 소장품이나 육성 녹음들을 들으며 아버지의 기록들을 남기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야 알게 된 부친의 육성에서 자신(백경권 원장)을 향한 염원을 담은 내용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장남인 백경권 원장이 작곡가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내용을 들었다는 것이며 한 번도 자신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게 되니 더 사무친다고 고백한다.
2003년 83세의 일기로 별세한 故 백영호 선생은 처가 고향인 사천시 정동면 풍정리에 묘소를 마련했다.
그래서 백경권 원장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에 지난 2018년 사천에서 ‘백영호 음악제’를 열기도 했다.
백 원장은 사천에서 ‘백영호 음악제’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벽에 부딪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미자 선생을 비롯하여 과거 백영호 선생의 곡을 불렀던 가수들이 이제는 연로한데다 이동이나 전반적인 처우나 장소, 장비·시설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환경과 시간적인 여건 등이 맞물려 제2회 ‘작곡가 백영호 음악제’를 사천에서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백 원장은 감히 이야기 하는 것은 ‘동백아가씨’가 대한민국 트로트를 세운 노래이며 최초의 100만장 돌파를 통해 레코드회사의 산업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백영호 선생의 이러한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부 음악계전문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적시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고 말한다.
서민의 작곡가 서민을 위한 작곡가 평범한 가슴과 생각을 가졌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영혼의 작곡가 백영호 선생의 음악은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서 우리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음악으로 다가올 것이다.













